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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받고 1년이 지난 뒤 연락 받아 결혼한 가수 하춘화

by 김준민 2020. 1. 29.

패널로 출연해 후배 가수들을 응원해 화제가 되고 있는 가수 하춘화는 <아침마당>에서 후배 가수 다섯명의 노래를 듣고 응원했는데요. 전국이야기대회 꿈의 무대 패자부활전으로 방송된 내용으로 시청자들의 득표를 많이 받았던 가수들이 출연했었습니다. 오늘은 하춘화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춘화는 1955년 6월생으로 1961년에 <효녀 심청 되오리다>로 데뷔한 가수입니다. 무려 6살의 어린 나이로 데뷔한 가수로 하춘화가 데뷔했을 때는 박정희 5.16 군사정변 시절입니다. 데뷔할 때부터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요.

 

 

 

 

하춘화의 아버지는 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보고 서울 동아예술학원을 다니게 만들어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운 다음 가수로 데뷔 시켰습니다. 1966년 <아빠는 마도리스>라는 노래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1971년 처음으로 낸 음반 <물새 한마리>는 많이 팔려나갔습니다.

 

1971년에는 <잘했군 잘했어>라는 노래를 고봉산과 함께 불러 TBC에서 여자 가수상을 4주 연속 받기도 했습니다. 선배 가수인 이미자, 패티김, 문주란 등과 함께 정상의 여자 가수로 거듭났어요. 그리고 하춘화는 성공했음에도 대인배 성격을 지녔습니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소외 당하던 무명이었던 이주일을 보고 하춘화는 자신의 공연에 꼭 이주일을 사회자로 시켜달라고 말해 이주일과 함께 일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주일은 그 뒤로 코미디언으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길거리에 나앉을 뻔한 자신을 하춘화가 살려 집을 마련했다고 밝히기도 했었어요.

 

1977년에는 이리역에서 폭발사고가 생겼었는데 그때 하춘화는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해 하춘화를 등에 업고 뛰어 병원까지 도착해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그 당시 이주일의 상처가 전치 4개월이나 되는 중상이었다고 하는데요.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하춘화는 2년 뒤인 1979년 경남대학교에 입학하고 학업과 결혼 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했습니다. 그리고 1981년 사업가인 남자와 첫 번째 결혼을 했는데요. 하지만 10개월 뒤 이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이혼한 이유로는 성격차이 때문이라고 하죠.

 

1981년 가수로 다시 복귀해 <우리 사랑 가슴으로> 등의 명곡을 히트시켰고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를 발표해 인기를 끌었습니다. 개그맨 김영철이 하춘화를 성대모사하는 노래입니다. 그 뒤로도 음반을 꾸준하게 내고 있는 레전드 가수입니다.

 

하춘화는 이혼 이후 언니 친구의 소개를 통해 지금의 남편과 만나게 됐다고 합니다. 처음 소개를 받아 남편과 만나게 됐는데 그 이후로 1년 동안이나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다가 1년 뒤 남편 이인순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연말에 하춘화가 호텔에서 디너쇼를 할 때 흑장미 100송이를 보냈고 디너쇼에 섰을 때 남편이 온 것을 알고 공연이 끝난 뒤 만났다고 합니다.1년 동안 연락이 오지 않았던 이유는 하춘화가 유명인이라 그게 부담스러워 1년 동안 고민 끝에 만날 결심을 했다고 TV조선 <호박씨>에 나왔을 때 밝힌 적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자신을 절대로 방송에 나가게 하지 말고 집에도 카메라가 오지 않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남편과 자신 모두 나이가 들어 한 결혼이라 주민등록 등본과 초본, 건강진단서까지 증명서를 교환한 뒤 결혼하게 됐다고 말하며 1995년 30대의 나이로 남편과 결혼했는데 자신이 20대였다면 남편이 이상형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생겼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 유산이 됐습니다. 그 뒤로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배들에게 베풀고 그동안 기부한 금액만 해도 200억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